어릴 적 땅따먹기를 하면 죽 그은 선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건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지만, 선은 어디든 놓여 있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놓인 선은 어디서든 나타나 나를 붙잡고 어느 한 곳을 선택하기를 요구한다. 여와 남, 늙음과 젊음, ‘비정상’과 ‘정상’, 세계는 두 개의 답 중 한 개의 이름을 가져야만 증명서를 쥐여준다. 그러나 증명서의 무게는 같지 않고, 선택의 바깥은 또 다른 외부로 밀려난다. 우린 끝없는 안과 밖에 속하는 과정에서 불균등한 사건과 폭력의 위협 속에 놓인다. 그러니 불안정한 ‘바깥’으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안’도감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전시에서 안팎 그사이에 놓인 경계선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불구불하며 때로 엉망진창으로 그어져 있는, 그 변덕스러운 경계들에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그 시작부터 경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밖과 안을 정하는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언어는 누구의 입과 손에서 나오는지 끈기 있게 물어왔다. 우리는 어떤 ‘답’이라는 새로운 경계선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통해 경계선의 흔적을 추적하거나, 바라보는 위치를 바꾸거나, 경계로 나눌 수 없는 차이들을 안고 있는 각 존재의 목소리를 전할 것이다.
안과 밖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으로 보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바깥에서, 또는 안에서 구부려보거나 다시 꺼내어 마주치는 미미한 용기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그래서 넘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 글 자청
전시 리뷰
말랑한 용기에 관하여
가르고 길을 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른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어떤 소수자들의 말들을 기록한 비닐 커튼의 어느 한 곳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관람의 처음이다. 그러고 나면 여러 작업들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다. 누군가의 간절한 말들이 새겨져 있기에 ― 또한 약한 아크릴 판 위에 놓여 있기에 ― 밟을 수 없는 카펫, 그 위에 놓인 이름표가 붙은 풍선들, 그 옆의 또 다른 이름 붙은 풍선들의 뭉치와 그것이 가리고 있는 반투명한 파티션, 모래로 덮인 문장들을 품고 전시장의 가운데 쯤을 차지한 설치물, 몇 사람들의 역사를 안고서 그 옆의 벽에 걸린 작은 그림들, 맞은편 벽에 걸린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아마도 다급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관객들을 맞이했을) 영상, 그림과 영상 앞에 놓인 또 다른 모래 설치물들. 건물의 한 층을 채운 전시장의 어느 위치에 서든 하나의 작업을 한눈에 담기도, 한눈에 하나의 작업만 담기도 어렵다. 서로 조금씩 겹쳐진 이 사물들을 분별해 내기 위해 관객은 전시장의 작업 배치도를 살핀다.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 너무 착하다고, 밋밋하다고.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인 체제를 비판하는 것, 심지어는 그 체제에 기생하는 개인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찾아 공격하는 것이 마치 시대정신인 듯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미 오래 전에 전시장에 진입한, 비체니 괴물이니 하는 말들로 설명될 형상들은 여전히 ― 혹은 다시금 ―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런 시점에 펼쳐진, 보듬거나 곱씹는, ‘따뜻한’ 이미지들은 무력하리만치 착해 보이고 밋밋하기까지 할 테다.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전시된 이미지들이 사회에 혹은 타인들에게 강력한 주장을 전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여기 모인 작업들은 상냥하고 안전한 것들인가? 그저 나는 이랬어요, 라고 말하고 당신은 어땠나요, 하고 묻는 것들, 그래서 서로의 품과 눈물로 온기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거기에 그치는, 그런 것들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나서 싸우리라고 선언하거나 나서 싸우자고 권하지 않는 이 이미지들은, 견고한 세계의 벽앞에서 그저 멈춰 있을 뿐이라고, 혹은 오히려 자신의 세계 속으로 숨어들 뿐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아마도 힘을 갖지 못한) 타인을 대할 때 종종 ‘남성의 얼굴’을 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권세정의 「커뮤니티」, “신파를 뺀” 개인으로서의 제 할머니(들)를 마주해 보려는 시도인 김인선의 「2 제곱미터」, 학령기에 “쉽게 주고받았던” 폭력들을 구체적인 해설이나 비판 없이 감각의 층위에서 되짚는 봄로야의 「수치의 치수」,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채 ‘가장’에게 끌려 다녀야만 했던 이주의 기록들과 함께 “풀리지 않는 물음” 주위를 맴도는 윤나리의 「다시 0이 되는 방법」, 작가 주위의 여성들이 겪어 온 역사를 기록하는 자청의 「세 개의 원」, 쉽게 수치화 되며 내용을 잃고 마는 고통의 소통가능성을 질문하는 정문경의 「안개」, 어느 관광지에서 ‘신’의 흔적을 만난 생경한 경험을 조악한 세트에서 재현하며 힘 없는 자들의 경합을 우화적으로 그리는 최보련의 「신섬神島」, 신체를 재현하고 그것을 식별하는 데에 동원되는 무의식적 틀들을 추적하는 혜원의 「그림자의 영역」.
리플렛과 배치도를 들고 여덟 명의 작업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보아도 (적어도 약간은 결이 달라 보이는 최보련과 혜원의 작업을 잠시 미루어 둔다면) 여성적인 것, 개인적인 것, 고통스러운 것 따위의 오래 묵은 키워드들 이상을 찾기는, 더듬고 되짚고 끝을 흐리는 따위의 오래 묵은 방식들 이상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알려지지 않은 사회적 문제를 발굴하는 것도, 알려지지 않은 감각을 발명하는 것도 아닌 이 작업들은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프로젝트”라는 노뉴워크의 슬로건을 오히려 무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심하자. 『구부러진 안팎』은 하나의 전시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그저 여덟 명의 작가가 만든 열 점 여의 작품들이 아니다. 쉽사리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드는 듯 보이는 이 작업들은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관계, 혹은 공동체 같은 말들로 번역될 수 있을 덩어리를. 작금의 세계를 새로이 인식하는 틀이자 도래할 세계를 설계하기 위한 틀로서의, 그러니까 사회를 겨냥하는 이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이란 말을 생각할 때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있거나 혹은 여전히 세계로 나오기 위해 준비 중인 듯한 이 여덟 명은 실은 이곳에서 이미 자기 바깥으로 나와 공동의 세계를 만드는 하나의 실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용기. 그제서야 떠오르는 것은 이 겁 많아 보이는 사람들의 용기다. 자신의 자리에 기꺼이 타인을 들이는 용기. 타인에게 자신이 가려져도 조급해 하지 않는 ― 이 공간을 채운 작가들과 작품들, 그리고 관객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대화할 수 있으리라는 겁 없는 태도. 체제에 억압되지 않는 개인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이나 개인들이 서로에게 자신의 얼마만큼을 내어주며 하나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미술에서 새로움은 늘 중요한 화두이지만 생각이든 느낌이든이 소통가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새로움은 언제나 제한적인 것,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체제를 공격하는 대신 스스로를 탐구하는 듯한 이 이미지들, 새로움을 찾는 대신 공유하는 감각에 기반한 듯한 이 이미지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역에 상대의 조금씩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 이미지들은 안주하고 숨어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려 드는, 오히려 급진적인 실천들이다.
스스로를 고백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고백들 중 하나로 남겨 두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로써 이들은 용감한 벗들을 만난다. 숨겨둔 문장을 읽기 위해 생채기도 마다 않고 거친 모래를 파헤쳐 바닥을 더듬는 벗을, 여전히 쉽사리 터지고 찢기는 풍선 같은 자신을 느끼면서도 날붙이로 가득한 서로를 껴안는 벗을, 충돌과 상처를 예견하면서도 서로의 역사를 더듬고 기억과 이해와 공존을 시도하는 벗을, 뿌연 벽 뒤에서 흐릿한 형체로만 보이는 저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려 만나고야 마는 벗을, 어쩌면 가장 곤란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기로 마음 먹는 벗을 말이다.
전시는 지하의 좁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계단 끝에 위치한 방의 입구에는 또 하나의 모래 설치물이 있고, 내부로 들어가면 빛과 그림자를 사용한 작업과 그 작업의 가운데를 가르고 걸린 영상이 있다. 스스로의 힘없음을 깨닫는 데에서 끝날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재현되는 신체 이미지들을 쉽게 분류해 내던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 세부를 잃은 그것들을 보며 자신의 분류 능력을, 그것의 토대로 삼아 왔던 어떤 기준을 의심하게 될 때. 혹은 신神의 흔적만이 남은 곳에서조차 여전히 신과 싸워야 하며 그런 싸움 속에서 홀로 지켜가는 자신을 볼 때. 그러나 그 틀을 잃은 후에도 내가 여전히 당신을 알아 볼 수 있을 때, 소리지를 힘을 잃은 후에도 서로 교대해 가며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때, 또 한 번 스스로 되찾게 될 것이다. 우리의 힘을. 우리의 용기를. 우리의 벗을. / 안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