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언어의 사용자들은 자주 이중 구속의 상황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종전의 이야기 방식을 따를 수는 없다. 이유는 발화 방식 자체가 문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의 각축장 한가운데서 말문이 막히는 이 순간은, 정적인 고요함이 아니라 거대한 역동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확대하거나 축소함으로써 거리를 조절하고, 가청 영역 밖의 음향을 불러들이고, 이를 반복하여 접붙이거나 생략과 강조를 통해 주로 ‘재현되지 않는 것’의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본 전시에 참여하는 6명의 작가가 시도하는 바이다.
한편에선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의 서사를 강조하는 법정의 언어를, 다정하고 따듯한 일러스트의 톤엔 매너가 표현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잔여를, 종종 자본의 교환가치로 매개되는 것이 전부인 듯 보이는 유희 감각과 체험의 영역을 뒤틀어본다. 다른 한 편에선 과대표된 남성 정치인 개인의 이미지와 여전히 집단으로 호명될 뿐인 여성-묶음이 작동하는 불균형한 이미지의 권력을, 하나이지도 두 개이지도 않은 성을, 그리고 해상도가 높아진 혐오 발언의 공간적 침범을 직시한다.
이 모든 작업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그토록 곤혹하게 만드는 언어를 다시 사용하도록 요청한다. 다시 쓰인 언어를 통해 얻어지는 효과는 교육적일 수도 있고,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보는 이가 느끼는 바를 생산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모종의 환상에 의해 지탱된다. 이 환상은 자주 어떤 태도나 제스처에 그름이 없다고 여기기 위해 필수적이며, 이는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크고 떫게 돌려보기』는 무엇을 연출하고 의도를 전달한다는 것의 효과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대신, 그리고, 혹은 그렇다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재현의 매뉴얼을 제시하는 대신, 고의적인 모호함과 직접적인 구체성을 함께 활용하여 작품에 잠복한 독해의 틈을 가능한 만큼 열어두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보는 이 또한 앞서가는 과거와 뒤따르는 미래의 언젠가 마음에 일(었던) 역동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보련